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섬너 상원의원 구타 사건 (문단 편집) == 여파 == 섬너 상원의원은 머리 부상과 [[PTSD]]로 인해 3년이 지난 [[1859년]]까지 상원에 출석하지 못했고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. 브룩스 하원의원은 이 공격이 자기 방어였다고 주장했다. 그가 받은 형벌은 지방 법원에서 부과한 [[벌금]] 300달러 뿐이었다. 브룩스 의원의 의원직 박탈 투표가 열렸지만 남부 의원들의 반대로 실패했다. 어찌되었건 브룩스는 7월 15일 사임해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내려가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십여일 뒤인 [[8월]]에 열린 하원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어 다시 [[사우스캐롤라이나]] 하원의원이 되었지만 이후 급성 후두염으로 사건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. 재선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고 한다. 케이트 하원의원도 사임했지만 재임해 계속 의원직을 지냈다. 그러다가 [[남북전쟁]]이 발발하자 [[아메리카 연합국]]에 합류해 제20 사우스캐롤라이나 보병연대(20th South Carolina Infantry Regiment)를 이끌었지만 1864년 콜드 하버 전투에서 전사했다. [[찰스 섬너]] 상원의원은 이후 [[새디어스 스티븐스]] 하원의원 등과 함께 [[공화당 급진파]] 계파를 이끌면서 [[재건 시대]] 동안 흑인 남성의 투표권 등 재건 시대 법을 지지했으며 평생 후유증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룩스가 죽은 후 18년을 더 살았는데 브룩스보다 8살이나 더 많았다는 걸 감안하면 26년이나 더 산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